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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
  • 내가 아는 친구는 몇 명이나 되나?

  • 작성자 : 이*양 작성일 : 2024-04-01 조회수 : 34

                                                                내가 아는 친구는 몇 명이나 되나?

이계양(광주푸른꿈창작학교 교장)

 

고고성(呱呱聲, 아이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우는 소리)이라는 말이 있듯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울면서 태어난다. 이를 두고 살아갈 일이 두렵고 걱정스러워 내지르는 소리 또는 환하고 넓은 세상에 나오면서 마음이 활짝 열리는 소리라고도 한다. 울음의 연유야 어쨌든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아는 사람, 아는 것, 가진 것이 제법 많다. 그중 아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네 인생이란 결국 사람들과의 앎 자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아는 걸까? 내가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어디까지 무엇을 안다는 말이며 그 의의가 무엇일까.

흔히 아는 사람을 친구(親舊)라 일컫는다. 요즘엔 sns가 확산되면서 인친(인스타그램 친구), 페친(페이스북 친구), 트친(트위터 친구) 등을 비롯하여 실친(실제 친구)까지 친구의 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실로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세계 도처에 수천 수만의 친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친구라고 여기며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진화생물학 교수 로빈 던바가 쓴 발칙한 진화론(김정희 역, 21세기북스)이라는 책이 있다. 원래 제목은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친구가 필요한가?(How many friends does one person need?)”로서 친구의 숫자를 다루고 있다.

던바는 1970년대 아프리카에서 야생 원숭이들의 집단생활을 수년 동안 관찰해보니 인간 등 영장류의 뇌 용량은 한계가 있어 친밀한 관계를 맺는 대상이 150명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집단의 크기와 대뇌 신피질의 크기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개코원숭이, 짧은꼬리원숭이, 침팬지 사회 등에서 확인한 신피질과 집단 규모의 상관관계에 기초해 추정하면 평범한 한 개인이 맺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최대치는 약 150명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던바는 수렵 채집 생활(자연스럽게 형성된 인간 집단사회)을 하는 수십 개의 부족 사회의 평균 규모가 153명임과 영국인들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1인 평균 68곳에 보내고 그 가족을 포함하면 약 150명이었음을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또 로마군의 기본 전투단위인 보병 중대는 약 130, 현대 군대의 중대 단위도 세 개 소대와 지원 병력을 합쳐 대개 130~150, 공동체 생활을 하는 기독교 개신교의 근본주의 일파인 아미시(Amish) 공동체의 규모도 평균 110명임을 보고하고 있다.

결국 던바는 진짜 친구(한 사람이 사귀면서 믿고 호감을 느끼는 사람, 예고 없이 불쑥 저녁 자리나 술자리에 합석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의 수는 최대 150명이라고 주장한다. 이 진짜 친구의 수를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고도 하는데 150SNS를 통해 디지털 세대의 친구 숫자가 수천 명 단위로 늘어난 상황에서 아무리 새로운 기술 도구를 통해 인맥이 확대되더라도 숫자의 변화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시 나에게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친구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실제로 살아가면서 친밀감을 느끼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같이 살 수 있는 사람 즉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친구의 사전적 의미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지만 인디언들은 '나의 슬픔을 대신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기쁘고 달콤한 것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을 내 짐으로 여기고 함께 해주는 사람이 친구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친구란 항시 그 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내 곁에 있는 사람으로 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인디언들은 나무를 '서 있는 키 큰 친구'라고 하지 않았을까. 제 자리에 서 있기에 나와 하나가 될 수 없지만, 키 큰 모습이 나와 다르지만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공존 공생하는 나무가 친구라는 말일 터이다. 곧 나와 한 몸 공동체로 여겼기에 가능한 말이다.

유백두여신 경개여고 하즉 지여부지야(有白頭如新 傾蓋如故 何則 知與不知也)”(사마천의 사기(史記)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라는 말이 있다. “백발이 되도록 오래 교제하여도 새로 사귄 것 같은 사람이 있고, 수레를 멈추고 잠깐 만났어도 오랜 친구 같은 사람이 있다. 이는 어찌 그런가? 이는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의 차이 때문이다는 뜻이다.

한 해가 가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공동체를 이룰 친구는 몇 명이나 되나?”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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